소수면 수리2구에 있는 부자독립운동공적비 입니다.

이 비는 독립운동가인 김용응(金鏞應 1870~1945)과 아들인 김태규(金泰珪 1896~1956)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대한노인회 괴산군지회에서

1991년에 세운 공적비 입니다.

비의 전면에는 부자독립운동공적비라고 한글로 음기되여 있으며 뒷면에는 그 내력이 기술되여 있습니다.

석조 울타리를 두르고 있으며 마을의 느티나무숲에 있습니다. 주위에는 김상일 혜급불망비가 있습니다. 



김용응은 안동인이며 장릉 참봉을 지내고 신간회 괴산지회장을 역임한 인물입니다.김용응 선생은 병농(炳濃)이란 이름으로 국내에서 중국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에 보낼 군자금 조달 등의 활동을 하다 일본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김용응은 독립운동가입니다. 소수면 수리(壽里)에서 출생하였다. 본적은 안동(安東)이다. 장릉참봉(章陵參奉)을 지냈으며,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주로 상해임시정부와 연락하여 국내에서 군자금 조달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광주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였다.

8·15 광복 후에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특위위원장에 추천하여 취임케 하려하였으나 병환으로 취임하지 못하였다. 그의 손자가 중죄를 범하였으나, 조부의 독립운동 공로로 인해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배려로 감형의 혜택을 받은 사실이 있다.

두 부자의 독립운동은 김태규 선생의 차남인 김형식(89) 옹의 좌익 전력으로 그늘에 가려지는 아픔을 겪었다.
김 옹은 빨치산 활동을 하다 붙잡혀 20년간 장기수로 옥살이를 한 뒤 고향에 정착했으나 최근 건강이 좋지 않아 고향을 떠나 생활하는 것으로 전해졌다【참고문헌】문중세진록」





김태규는 김용응의 아들로 대한외교청년단을 조직하여 활동한 인물로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태규(金泰珪) 1896(건양 원년)∼1956이며 독립운동가. 소수면 수리(壽里)에서 태어났다.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인 아버지 김병농(金炳穠)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파리강화회의에 송부할 의견서 및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독립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중국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는 3·1운동 직후 대한민국청년외교단(大韓民國靑年外交團)의 재무부장(財務部長)을 역임하여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의 외교원 해외 파견 및 기관지 <외교시보(外交時報)>의 발간 등에 필요한 자금지원을 관장했다. 1919년 10월 외교 연구를 목적으로 상해(上海)에 파견되었으며, 임시정부에서 괴산군 조사원으로 임명되어 지방의 유력자, 재산가,학교, 종교 등 지역 전반 사정을 조사하는 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임무를 목적으로 국내로 잠입하였다가 11월 말 발각,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0년 6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56년 3월 27일 별세하였다. 정부는 1963년에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인생은 아름다운 거라고
매일매일 최면을 걸며 사는 소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