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내동 옛 중원군청자리입니다

중원군이 충주시와 통합되면서 중원군청으로 사용되던 이 곳을 주민들을 위한 공원으로 만들었습니다 .





관아공원내에는 충주 청령헌(淸寧軒)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83년 보수할 때 옥개 부분에서 상량문이 발견되어, 1870년(고종 7) 8월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같은 해 10월에 충주목사 조병로(趙秉老)의 지시로 창룡사를 옮겨 중건한 건물임이 밝혀졌다. 그 동안 내부를 개조하여 중원군 청사로 사용하다가 1983년 군청이 이전하면서 해체 복원하였다.


충주 제금당(製錦堂)은 조선시대 초기 지방 행정 정청으로 1870년 청령헌과 함께 소실되었던 것을 충주목사 조병로가 중건하였으며, 이듬해 출입문인 내삼문을 세웠다. 충주읍사무소, 중원군수의 관사로 사용해 오다가 1983년 해체 복원하였다. 청령헌과 제금당이 있는 관아 터는 현재 관아공원으로 조성되었다. 관아공원에는 충주읍성의 준공을 기념하고자 건립한 충주 축성 사적비가 있다.





관아공원에는 충주목 동헌으로 쓰던 청령헌(淸寧軒)과 내아로 사용하던 제금당(製錦堂), 그리고 산고수청각(山高水淸閣), 솟을삼문, 충주 축성사적비, 충청감영 외문루, 수령 510년의 보호수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충주 지역의 천주교는 한강의 뱃길을 이용하여 경기도 양근에서 발원한 선교의 씨앗이 광주, 여주를 거쳐 전파되었다. 양근의 권철신, 권일신의 영향으로 충주에서는 이기연, 이부춘, 이석중, 권아기련 등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실천하다가 발각되어 1801년 신유박해 때 이들을 포함한 8명이 충주에서 순교하였다. 또 충주 출신으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으나 다른 지방에서 활동하던 이국승 등 3명도 이때 순교하였다. 또 기해박해 때에는 충주 출신 남이관이 가족과 함께 서울에서 순교하였다.

가장 피해가 컸던 병인박해 때는 충주에서 순교한 이가 공베드로를 비롯한 112명이었고, 남종삼, 황석두와 같이 충주 출신이 서울 등 다른 곳에서 순교한 이가 31명이나 된다. 박해별 순교자 현황을 보면 신유박해 11명, 기해박해 1명, 병인박해 143명으로 모두 155명이고, 이를 지역별로 보면 충주에서 순교한 이가 120명, 타 지역에서 순교한 이가 35명으로 확인된다.

이러한 숫자와 기록에 의하여 한국천주교회에서는 순교자를 현양하기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 신자들이 심문을 받았을 충주관아에 현양비를 세우기로 하고, 천주교 청주교구에서는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2002년 5월 13일 현 위치에 순교자 현양비를 세웠다.





1866년(고종 3)에 병인양요를 겪은 뒤 전국의 성첩과 군기를 보수하여 유사시에 대비하라는 조칙이 내려오자 1869년 2월부터 읍성을 개축하기 시작하여 10개월 만인 11월에 준공하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화강암 충주 축성사적비를 세웠으며, 앞면에는 축성 연대와 성의 크기, 문루의 크기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며, 1277년(충렬왕 3) 충주성이 개축(改築)되었고 1870년(고종 7) 병인양요 후 조칙에 의해 충주성이 개축되었다고 한다. 충주 청령헌은 1870년 8월 화재로 소실되어 같은 해 10월 충주목사 조병로가 중건하여 세웠다.

그 후 1895년(고종 32)에 전국이 23개 부로 나뉘면서 충주부의 관찰사가 사용하였고, 이듬해 13도 행정 구역으로 변경되면서 충청북도관찰사의 집무실이 되었다. 또 1908년(순종 2) 5월 25일 청주로 도청이 이전되면서 충주군수의 정청(政廳)으로 이용되었다. 그 후 한말 의병 운동기에는 호좌의병장 의암 유인석이 한때 충주성을 점령하여 위세를 크게 떨쳤던 곳이기도 하다.






관아공원은 주변에 있는 충주문화회관, 관아갤러리와 함께 충주 시민들의 휴식 공간이자 역사 공부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관아공원은 곳곳에 자리한 거수목과 고색창연한 관아 건물이 어우러져 옛 정취를 풍기고 있다.










인생은 아름다운 거라고
매일매일 최면을 걸며 사는 소시민......